연세대학교 백양로 _ 건축가 한기영
백양로, 느린 시간의 '장소'가 되다
제 13회 Gansam Design Award 우수상 수상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에서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공간과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질량이 큰 물체는 강력한 힘으로 상대적으로 질량이 작은 주위의 물체를 끌어당기고, 끌어 당겨지는 물체 주위의 공간을 휘어지게 만들면서 상대적으로 시간을 더 느려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질량이 큰 물체’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바람을 반영하고 그들의 다양한 행태를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경적 요소와 건축적 장치들도 때로는 이런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이른바 ‘Green Gravity’ 가 되어 사람들을 공간 속으로 끌어들인 후 오솔길 사이를 걷게 하거나 나무 그늘 아래에 쉬게 하면서 느린 시간 속으로 이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생각과 추억을 만들게 된다. 느리게 느끼는 시간은 추억이 되고, 추억이 쌓이면 역사가 된다.
다시 사람을 중심에 두다.
연세대학교 백양로는 1969년, 자동차 통행을 위해 확장한 이후 더 이상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었다. 발자국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오솔길이었던 처음의 기억은 온데간데 없고 마치 일정한 굵기의 관을 통과하는 물처럼 무미건조하게 사람들의 흐름을 일정하게 만들면서 한 방향만을 향하게 했다. 자연의 지형을 따라 흐르는 물이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바위를 타고 넘치기도 하고, 흙을 깎아내며 자연스러운 곡선을 만들기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흐름도 조용하고 사색적인 것으로부터 소란하고 분주한 것들까지 다양하다. 새로운 백양로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자연의 지형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백양로를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모든 교통 흐름이 지하화된 이곳에서는 자동차에 방해받지 않고 지상과 지하 공간 모두를 한가롭고 여유롭게 걷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초기 백양로의 오솔길처럼 생각하는 걸음이 가능해져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소통하는 장(場)이 될 것이다.
기존 백양로에 대한 사람들의 바람은 지상에서 자동차에 방해받지 않는 것만이 아니었다. 백양로 위에 새겨진 지난 역사와 미래의 역사가 될 앞으로의 시간들을 어떻게 채워 나갈지에 대한 염려도 있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수도없이 고민하며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먼저 백양로의 메인 축을 따라 좌우로 펼쳐지는 외부 공간에 백양로 주변 건물들의 특성을 반영하여 고유한 영역성을 가질 수 있도록 계획하고 기존 캠퍼스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를 조율하는 한편 독수리상, 한글탑, 활천대, 이한열 추모비 등 역사적 기념물들을 새로운 질서 속에 다시 위치시켰다. 그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흐름을 유도하는 소로(小路)들을 계획하고 외부 공간의 특성에 맞게 나무들과 Street Furniture를 조화롭게 디자인함으로써 사람들이 채워 나갈 백양로의 시간들을 그제서야 그려볼수 있었다.
비로소 ‘장소’가 되다.
지난 10월에 준공된 백양로는 여러가지로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갓 이식된 나무들이 충분히 본래의 모습을 갖추지 못함으로 해서 작년 가을 같은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풍성하게 자라난 나무들과 함께 가을을 맞을 수 있을테고 시간이 흐를수록 백양로는 점점 아름다워질 것이다. 처음에는 꽉 찬 느낌 없이 비어있는 모습이지만 볼 때마다 풍성해지고 성장해 가는 곳,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지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처럼 숙성되는 곳이 사람들에게는 ‘장소(The place)’가 된다. 백양로는 바로 그런 ‘장소’가 될 것이다.
20년 후 나는 백양로에 대해 이런 글을 읽기를 기대해본다.
‘2035년 11월, 개교 150주년이 되는 해의 늦가을.
백양로는 어느 때보다도 노랗게 아름다운 길이 되었다. 20년 전 이즈음 새로 열린 백양로에는 제법 굵고 무성해진 느티나무, 은행나무, 백양나무들과 함께 이 길위에 쌓인 낙엽만큼이나 많은 역사가 쓰여졌다. 그동안 나는 나무만큼 성숙해졌고,백양로도 기분좋게 나이가 들었다.’